










아픈 역사가 맞지만,
북한에서 지령받고, 폭동일으킨거를 민주화운동으로 둔갑. 예쁘게 "민주화로" 포장. 옹호해버림.
뭔, 숭고한 희생이야? 하는것보면, 민노총이랑 판박이임. 인정못해
<사전지식>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사망이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이 12.12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함.
좌파들은 이걸 엄청 중요시함. 달달 외운다니까..
518성역화. 신성시해.
518민주화 운동 조롱 처벌법을, 정청례가 발의.
운동권 애들이, ((자기들이 한짓을 정당한거라고 생각하며))
독립투사로 미화하더라.
북한 교과서엔
김일성 교시에 따른, 반)파쇼 투쟁이라고 기술되어있음.
북한은 남한의 민주화 시위와 반정부 운동, 파업은 모두
김일성 교시에 따라 일어난것으로
광주 민주화 운동은, 주체의 기치를 따른 가장 성공한 인민혁명 사건.
최근에, cu사태때, 차 밑에 깔려서 사망한 그사람, 생각남. 니들은 이런거보면서 슬펐어?
<가족들외+직장동료외에, 모든 사람이 슬퍼할까?>
부모님들은, 대학생 아들이 뭐하고 다니는지 잘 모르더라.. 지금도 그런데, 그때는 더더욱..
절대 누굴 깍아내리는거 아님.
내전에 더 가깝다고 함.
대학생을 이용해, 체제전복을 꿈꿔. (운동권)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 진압, 시민군과의 처절한 시가전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간의 광주는 혼돈의 도시였다. 더욱이 22일 계엄군이 철수한 후의 닷새 동안은 무정부 상태였다. 이때 광주 해방구를 이끈 첫 번째 지도자는 스무 살의 재수생 김원갑이다. 그는 22일 이른 아침 500여 명의 무장시위대로 시민군을 조직하여 도청을 접수하고, 차량 안내방송을 통해 동요하던 시민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도청 광장에서 ‘광주 지역 10개 대학 연합 민족 · 민주화 대성회’를 주도한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
*김창길은 회수된 총기 중에서 카빈소총 150정을 반납하고, 대신 계엄사에 연행된 34명을 석방
*5월 21일에 발생한 3건의 ‘반국가적 사건’이다.
* ‘20사단장 지휘차량 탈취 사건’ ‘아시아자동차공장 장갑차량 탈취 사건’ ‘전남 도내 무기고 탈취 사건’
*22일 저녁까지 1500정가량의 총이 수거되었는데, 이를 미처 정리하지 못해 도청 수위실 주위에 수북하게 쌓아놓았다.
*전남도청 지하실에 있던 폭약이다. 이 폭약이 폭발하면 광주시가지의 절반이 날아갈 것이라는 소문에 계엄군도 진압작전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도청으로 들어와 마당에 총기와 폭약이 아무렇게나 널렸는데 8t 트럭 4대분이나 되는 엄청난 물량이었다.
“광주시민이 다 죽어도 민주화는 해야 합니다??” 과격함이 드러남
정의와 민주화를 내세우며 무장투쟁을 주장하면 자랑스러운 일이고, 국가와 생명의 존엄성을 말하는 것은 배신자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범시민민주투쟁위원회 학생혁명위원회(25일 결성한 민주투쟁위원회와 별개의 조직)의 ‘결전의 순간이 왔다’란 전단에 “행동강령으로 무기를 제작하라!(다이너마이트, 화염병, 사제폭탄, 불화살, 불깡통, 각종 기름 준비), 전 시민 관공서를 불태워라, 차량을 획득하라, 특공대를 조직 무기를 탈취하라! 아! 형제여! 싸우다 죽자!”라고 적혔을 정도로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도청 안 쿠데타가 일어난 후에는 무장 항쟁을 통한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민중운동권이 주도권을 확보하면서 민중 항쟁으로 성격이 변질되었다.
광주시내 10개 대학 연합 민족·민주화대성회는 평화로운 횃불시위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 횃불, 촛불 ㅈㄴ 좋아함.
폭동일으켰는데, 어떻게 비상계엄을 해제해? 폭동 다 진압되야지 해제를 하는거지. < 쿠데타 급 >
돌아가는 꼴을 보면, 제주4.3이랑 비슷하게 돌아감.
그때당시,
군인들 군기 엄청나서, 난폭하게 한거는 맞음. 과격진압
계엄군이 미친짓을 많이함.
518에 대해
이것도 말하면 또 안된다며...ㄷㄷ
진실을 말하면, 잡혀가는 세상이 되버림.
민주화운동하는데, 총이 나오냐? 총을 탈취했어ㄷㄷ
518 유공자 명단 투명하게 공개하라니까, 절대 안함
왜 안할까?ㅋ
북한에서도, 518에 대해 교육을 하던데, <잘했다고 빨아줌>
왜 그럴까?ㅋ // 이건 증언이 있다.
518폄훼한다고 또 발光을 하겠네. // jtbc에서 이러더라
518는 성역화시키면서, 625는 챙기지도 않음.
국민들을 개돼지 취급하며, 얼마나 무식한 사람 취급하는거야? <누굴 바보등신으로 보나>
좀만 찾아보면, 다 나오는걸 가지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려고 한다니까
우리가 기억하는건, 그냥 두들겨맞으것밖에 기억못하잖아
저 안에선,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우리는 이뤄야한다. ㅇㅈㄹ하고 있는데...
위에 얘들이 문제인거야. 밑에서 따라다니는 애들보다
그때 시민군을 지휘한 상황실장 박남선과 기동타격대장 윤석루는 계엄군이 도청에 진입하면 다이너마이트를 폭파하고 자폭하겠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그들의 젊은 혈기와 행태를 보면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을 개연성이 상당히 높았다.
5월 14일 이전에 이미, 총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소리임. 스샷. 14-16일 사이 총기 탈취가 이미 이뤄졌겠지.
무기관리담당+총기회수반+차량통제반+수리보수반+의료반 까지...
이미 무기를 들고있으니까, 그걸 진압하기 위해 군인들이 들어간게 순서가 맞는거지.
단순히 데모한다고, 군인 투입했겠어?
그러니 당구장에 있던 대학생들, 대학생들처럼 보이는 사람 모조리..
그날 방철호 목사는 5.18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들려주었다. 도청 지하실의 폭발물을 지키기 위해서 수습대책위원들이 출입구 앞 도청 마당에서 밤을 새웠던 얘기.
당시 광주에는 초등학생도 총을 메고 다니는가 하면, 수류탄의 안전핀에 줄을 달아 어깨에 두르고 다니는 사람까지 있어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대다수 시민은 총기 오발이나 수류탄 폭발 등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무기를 회수하여 안전하게 보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전남도청과 광주공원에 접수처를 설치하고 무기 회수를 설득하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22일 저녁까지 1500정가량의 총이 수거되었는데, 이를 미처 정리하지 못해 도청 수위실 주위에 수북하게 쌓아놓았다.
다음 날부터는 수습대책위원인 조비오 신부·장세균 목사·이종기 변호사·남재희 신부가 함께 시내를 순회하면서 무기 회수에 나섰고, 25일에는 이성학 장로와 윤영규(초대 전교조 위원장)도 합류하여 외곽 지역을 돌며 활동했다. 그 결과 4500여 정의 총기가 회수되었는데 유실된 총기의 90%가량이었다.
1980년 5월 광주의 실상을 이해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전남도청 지하실에 있던 폭약이다. 애초부터 시위대가 시민군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계엄군과 싸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럼에도 닷새 동안이나 대치할 수 있었던 것은 이 폭약이 폭발하면 광주시가지의 절반이 날아갈 것이라는 소문에 계엄군도 진압작전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22일 이전>
사실, 도청 지하실에 있던 폭약 뭉치는 시위대나 계엄군 모두에게 ‘아킬레스건’이었다. 시위대는 이 폭약이 자신들을 지켜줄 최후 보루로 여기며 계엄군과의 협상에 지렛대로 사용하였고, 반면 계엄군은 도청 진압작전 강행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런 마당에 문용동이 전교사를 찾아가 배승일을 불러들이고, 폭약과 수류탄을 해체해버렸으니 한순간에 지렛대 균형이 깨져버린 셈이었다. <북한 전술이랑 똑같음.>
무기고 관리는 무척 힘들고 위험했다. 도청 수비대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와 총과 실탄을 달라고 협박하였고, 밤이면 총구를 가슴에 들이대고 위협하는 경우도 많았다. 사소한 부주의로 오발 사고가 나거나 담뱃불이라도 떨어지면 폭발할 우려가 있어서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5월 20일에 발행한 범시민민주투쟁위원회 학생혁명위원회(25일 결성한 민주투쟁위원회와 별개의 조직)의 ‘결전의 순간이 왔다’란 전단에 “행동강령으로 무기를 제작하라!(다이너마이트, 화염병, 사제폭탄, 불화살, 불깡통, 각종 기름 준비), 전 시민 관공서를 불태워라, 차량을 획득하라, 특공대를 조직 무기를 탈취하라! 아! 형제여! 싸우다 죽자!”라고 적혔을 정도로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5월 25일 저녁 ‘도청 안 쿠데타’는 단순히 학생수습위원장이 김창길에서 김종배로 바뀐 것이 아니라, 항쟁의 성격이 ‘사회주의혁명’으로 선회한 것을 의미한다. 5.18의 출발은 학생들이 중심이 된 민주화운동이었다. <나중에 변질됨. 처음엔 다 좋은뜻에서 시작하지>
25일 도청 안 쿠데타가 일어난 후에는 무장 항쟁을 통한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민중운동권이 주도권을 확보하면서 민중 항쟁으로 성격이 변질되었다.
5·18이 유례가 없는 무력항쟁이었음에도 나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탄약관리반원들이 전남도청 지하실의 폭약을 안전하게 처리한 때문
도청 폭약관리반에서 활동한 문용동에 대해 ‘계엄군의 프락치’ ‘광주의 배신자’라는 부정적인 평가부터 ‘광주를 구한 의인’ ‘사랑과 평화의 순교자’라는 칭송까지 극명하게 다른 평가가 나타난다. <문용동 같은 사람이 있어서, 광주가 불바다가 안됐지>
1980년 광주시 인구는 72만명으로 익산의 2.5배인데다가 도청 주변의 밀집한 주거 환경을 감안할 때, “도청의 폭약이 폭발했더라면 이리역 폭발 사고보다 최소한 3배 이상의 피해가 날 것으로 판단했다”는 배승일의 증언은 상당히 합리적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필자는 문용동과 탄약관리반원들, 그리고 배승일을 ‘1980년 5월 광주를 구한 의인(義人)들’이라 부른다.
광주의 영웅하면, 저 2사람밖에 없음, 문용동, 배승일
학생과 시민들이 1980년 5월 24일 광주 외곽지역 파출소 등 무기고에서 자위권 확보를 위해 탈취한 각종 총기와 탄약을 전남도청 마당에서 정비하고 있다. 박태홍 뉴시스 편집위원이 1980년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로 재직중 5·18 광주 참상을 취재하며 기록한 사진을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에 즈음해 최초로 공개한다. <스샷>
이런 이유로 한동안 시민사회의 자발적인 무기 회수 운동이나 도청 지하실의 폭발물 해체 사건은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어 왔다. 정의와 민주화를 내세우며 무장투쟁을 주장하면 자랑스러운 일이고, 국가와 생명의 존엄성을 말하는 것은 배신자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 민노총이랑 똑같음 >
*평등의 함정.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이 문장으로 시작된 혁명은, 처음엔 분명 희망이였다.
처음 시작은 민주화 운동이였으나,
끝은, 민중 운동권으로(무장항쟁)으로, 실패함
5월 25일 저녁 ‘도청 안 쿠데타’는 단순히 학생수습위원장이 김창길에서 김종배로 바뀐 것이 아니라, 항쟁의 성격이 ‘사회주의혁명’으로 선회한 것을 의미한다.
5.18의 출발은 학생들이 중심이 된 민주화운동이었다.
25일 도청 안 쿠데타가 일어난 후에는 무장 항쟁을 통한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민중운동권이 주도권을 확보하면서 민중 항쟁으로 성격이 변질되었다.
5·18 기간에 해방구가 된 광주는 온건파가 나흘을 통치하고,
강경파가 마지막 하루를 통치한 셈이다.
5·18은 사회주의혁명을 꿈꾸던 운동권과 국가주의자들의 대결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사회,정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타벅스 사이렌 마케팅. 스타벅스 머그컵 (0) | 2026.05.24 |
|---|---|
| 자주국방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유.. (0) | 2026.05.24 |
| 노조가 만들어낸 급식 파행 - 대전 (0) | 2026.05.20 |
| 지방선거 출마자 35%가 ‘전과자’ (0) | 2026.05.16 |
| snl 퀴어코드 (0) | 2026.05.13 |